유럽 ‘이상기후’ 폭염…우리나라는 준비됐나
유럽 전역이 최근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올해 6월 서유럽 평균 기온은 섭씨 20.5도로 지난 30년 대비 약 2.8도 높아 ‘가장 뜨거운 6월’ 중 하나였죠. 바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중해 해수면도 27도로 3.7도 이상 상승했습니다.
과거 유럽에 가본 사람이 알고 있는 유럽의 여름은 ‘선선한’ 날씨였습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비교적 서늘했죠. 하지만 이 같은 유럽의 여름은 옛날이 됐습니다. 유럽은 지구 평균의 두 배 속도로 기온이 상승하고 있어, 앞으로 이러한 극한 폭염이 더욱 빈번해질 전망입니다.
올해 6월 23일부터 7월 2일까지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 약 2300명이 온열 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경제적 타격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알리안츠 리서치는 폭염으로 인해 유럽 경제성장률이 최대 0.5%포인트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또한 폭염으로 농작물, 물가 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유럽의 낮은 에어컨 보급률
이처럼 유럽의 여름은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지만, 정작 유럽의 가정용 에어컨 보급률은 매우 낮은 편입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미국 가정의 90%가 에어컨을 갖춘 반면, 유럽은 고작 19%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에어컨을 설치한 가정이 전체의 5%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영국 3%, 독일 3% 내외)죠. 프랑스 역시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에어컨 보급률이 10% 미만이었지만, 최근 연이은 폭염으로 2020년경에는 4가구 중 1가구 수준까지 늘었다고 합니다.
유럽의 낮은 에어컨 보급은 오늘날 기후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은 우리나라나 미국, 일본에 비해 냉방 수요가 높지 않았습니다. 북유럽이나 영국 등은 서늘한 기후 덕분에 여름이 짧았고, 남유럽도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로 습도가 낮아 그늘에만 들어가면 견딜 만한 수준이었죠.
반면 겨울에는 습도가 높아 기온보다 더 춥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 같은 기후에 맞춰 유럽의 건물은 두꺼운 석조 건물로 햇빛을 피하고 단열재로 습도를 차단하는 문화가 오래 전부터 발달했습니다. 여름에도 에어컨 없이 보낼 수 있는 구조였죠.
또한 경제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유럽에서 에어컨은 오래도록 일종의 사치재로 여겨졌습니다. 설치비용도 높지만, 무엇보다 전기요금 부담이 큽니다.
유럽 가정의 전기료는 한국보다 상당히 비싼 편입니다. 이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껏 가동하기가 쉽지 않죠. 유럽은 상업·공공건물 위주의 냉방 문화가 강해, 가정에는 냉방기를 아예 두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유럽 지역에서 폭염이 일상이 되면서 가정용 에어컨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IEA는 유럽의 에어컨 보유 대수가 1990년 이후 이미 두 배 이상 증가했고, 2050년까지 4배 가까이 폭증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냉방과 탈탄소 정책의 딜레마
에어컨 수요의 증가는 결국 전력 수요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탄소배출량도 늘어나게 되죠.
유럽 각국 정부는 폭염에 대응해 냉방을 늘려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라 냉방 인프라를 강화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탄소중립과 에너지 절약 정책과 상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유럽은 세계에서 기후변화에 가장 적극 대응하는 지역으로, 건물·가정 부분에서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에너지 수요를 억제하고 효율을 높이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예를 들어 단열 강화, 창호 개선 등 패시브 하우스식 건축 기준을 통해 냉난방 수요 자체를 줄이려는 노력이 대표적입니다. 에어컨 역시 가급적 쓰지 않고도 견딜 수 있도록 도시 녹지 조성, 건물 차양 설치 등 자연 친화적 대응을 권장해왔습니다.
또한 직접적인 냉방 규제도 도입했죠. 이탈리아는 2022년 에너지 위기 속에 이른바 ‘냉방 제한령’을 도입해 관공서 등의 실내 냉방 온도를 섭씨 25~27도 이하로 설정하도록 법으로 정했습니다.
동시에 한겨울 난방도 19~21도 이상 높이지 못하게 동시에 제한했는데, 이를 위반하면 벌금까지 부과되는 강도 높은 조치였습니다.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냉방 온도를 제한한 것은 러시아 가스 공급 중단으로 인한 에너지 절약 목적이 컸지만, 궁극적으로는 전력 피크 완화와 탄소배출 억제라는 정책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전례 없는 기후변화로 에어컨 사용이 확대되고 전력망에 부담을 줄 거라는 지적이 나오며 정부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시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냉방 확대와 지구를 지키기 위한 탄소감축 사이의 딜레마인 셈입니다.
지구온난화와 전력 수급 현실
폭염은 전력 수요 급증을 불러와 에너지 인프라의 취약점을 드러내곤 합니다. 최근 여름 폭염 기간 스페인, 프랑스 등지의 전력 수요가 평소보다 10% 이상 급증했고, 일부 도시에서는 전력 사용이 제한되거나 정전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2022년과 2023년의 연이은 폭염으로 여름철 원전 냉각수 부족 사태가 발생할 정도였죠. 강물이 마르고 수온이 올라가면서 2022년엔 한때 원전 가동을 줄여야 했고, 올해 6월 유럽 폭염 때도 프랑스 원전 18기 중 17기가 출력 감축 또는 정지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폭염이 단순히 전기 수요를 늘릴 뿐 아니라, 전력 공급 측면에서도 제약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는 사례죠.
결국 유럽 전력망이 앞으로 더 빈번해질 폭염에 대비하려면 배터리 저장, 스마트 그리드, 수요반응(DR) 등 유연성 자원을 시급히 확충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국가 간 전력망 연계를 강화해 남는 전기를 인접국에 보내고 부족할 때 받는 협력체계도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의 폭염과 전력 수급 딜레마는 다른 나라의 일만은 아닙니다. 한국은 이미 대부분 가정과 건물에 에어컨이 보급돼 있고, 여름철마다 냉방 수요가 크게 늘어납니다.
앞으로 한반도 여름 기온도 지속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전력 피크 대응력 강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기후대응 정책을 함께 가져가야 합니다.
유럽의 폭염 사태와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공급 불안정성을 미리 대비해야 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폭염 등 이상기후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려면, 평소 예비전력 확보와 유연한 수요 관리 전략이 필수입니다.
폭염은 더 이상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후변화 시대의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전력 수급 계획을 재설계해야 할 시점입니다. 유럽의 사례는 기후위기 속에서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그리고 지속가능하게 공급할 것인가라는 숙제를 남겼죠. 한국은 이 숙제를 다른 나라 일로 넘기지 말고, 선제적인 정책으로 답해야 할 것입니다.
김범수 세계일보 기자